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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에도 한류(韓流)는 있었다 -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
 위는 통신사가 타고 간 선박
(게이오
대학 도서관 소장). 아래는 에도시대 일본화가가 그린 조선통신사
인물도.
☞ 誠信의 교환
조선통신사는 조선과 일본의 7년간 즉 임진왜란과 정유왜란의 전후 처리를 위해서 시작되었다. 1592년 4월, 일본군 20만이 부산에 상륙함으로써 시작된 임진왜란은 일본천하를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야심에서 출발하였다. 임진년과 정유년의 재침 도합 7년의 전쟁으로 조선은 그야말로 쑥밭이 되고 만다. 明軍의 지원으로
조선군과 明軍의 합동작전과 전쟁에 지친 일본군 그리고, 토요토미 히데요시 죽음으로 전쟁은 종결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전쟁이 끝났지만 일본이 다시 재침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고 그 동안 일본군이 데려간 포로의 송환문제도 있어 조선정부는
사명당 송운대사를 대마도에 파견한다. 당시 일본 국내사정은 급변하고 있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內戰을 통하여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측근을 제압하고 실권을 잡고 있었다.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국내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조선과 더 이상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자신은 본래 조선 전쟁에
반대하였고, 그 후 직접 참가하지 않았던 것을 내세워 적극적으로 조선과 우호관계를 회복시키고 싶었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오사카 전투에 참가했던 이 때
그는 73세였다.
또 하나는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변화였다. 중국대륙에는 조선을 도와
일본을 물리친 明이 망하자, 만주의 소속민족이 淸을 건국 明의 혼란을 틈타 북경으로 진격하였다. 그 후 중국대륙의 중원을 차지한 淸의 독자적
외교질서에 일본과 조선은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당시 적대국이었던 조선과 일본이 대청 견제의 연대의식이 움트기 시작하였는지 모른다. 서로
독립국으로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교린관계가 필요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안팎의 분위기로 대마도에 온 사명당 일행은 대마도 영주 宗氏의 안내로 토쿠가와 이에야스을 만나기 위해 京都까지 오게
되었다.
당시
京都의 후시미 城에 체재하고 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사명당 일행을 만나 포로 송환에 성의를 보이고 조선과의 성의와 신뢰 즉 誠信의 교환을 통한 通交를
환영하였다.
그리고
조선에서 사절단을 보내주기를
요청하였다.
 일본에 가서 포로를 송환시켰던 유정
사명대사. 옆의 깃발은 임진왜란이 끝난후 1604년 사명대사가 일본과의 평화를 논의하기 위하여, 일본에 갈 때 선조가 하사한
길이 210cm의 깃발이다. ‘사대선교행 이조판서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 양국대장 사명당현제군 사령(賜大禪敎行 吏曺判書大匡輔國崇錄大夫 領議政
兩國大將 四溟當鉉諸軍 司令)’이라고 깃발에 적혀 있다.
조선정부는 포로 송환의 목적을 띄고 “회답겸 쇄환사”라는 이름으로 여우길을 正使로 하는 사절단을 보내게 된다. 그 때가 1607년이었다. 이 “쇄환사”는 그 후 1617년,
1624년 2회 더 계속 되다가 1636년 제4회 째부터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파견된다.
☞ 문화의 “로드 쇼"
포로 쇄환사로 시작한 조선통신사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회에 걸쳐 파견되었다. 조선에서 온 관리가 500여명, 조선통신사를 경호하는 대마도의 무사들 200명, 현지안내원 등
모두 1,000명 규모의 사절단이 구성되었다. 머무는 곳도 간단치 않아 체재지의 대부분은 절을 이용 분산숙박 하였다고 한다.
 조선통신사 행렬도.
당시 기록을 보면 대개 조선통신사가 한 번 왕복에 6개월에서 1년이 걸렸다고 하며, 여기에 소요되는 예산이 당시 일본 정부로서는 지금의 화폐로 환산하면 1,000억 엔의 재정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 외 사절단 영접 준비 등에 3,000명 정도가 차출되고 머무는 곳의 大名(領主)들이 지불한 돈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특히 나고야 지역에는 기소, 나가라, 이비 등 큰 강이 세 개나 흘러 1,000명이 강을 건너는데 각각 배다리(舟橋)를 가설하여
이용케하였다.
통신사가 오기 2년 전부터 시작되는 배다리 가설공사에는 수많은 인력과 재정이 소요되었다. 배다리는 배를 잇대어
판자를 깐 다음 양쪽에 새끼와 철사를 또는 등나무 등굴 등으로 메고 큰 기둥을 강 양편에 세워 두 줄로 배다리를 묶는다. 배다리에 사용되는 배는
강 3개에 모두 500척이었다고 기록되고 있다.
 저 멀리 흩어져 있는 배들 뒤로
배다리(舟橋)가 보인다. (에도 시대)
이러한 거대한 배다리 가설공사로 보아 당시 일본정부가 조선통신사를 얼마나 특별 예우하여 영접하였는지 알 수
있다. 당시 일본 지식인들은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숙소 등에서 조선통신사를 통해 漢字를 이용한 필담을 하였다. 그리고 서로 글을 주고받았다.
통신사 일행이
지나가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데는 5-6시간이 소요되었다고 하는데, 일본사람들은 도시락을 준비하여 아침부터 연도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통신사 행렬이 지나간 지방으로서는 대단한 행사였기에 곳곳에 그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글로서, 그림으로서 남겨놓았다.

각각의 소임을 상세하게 표기하여 남긴 두루마리 그림.
 에도시대의 최고 화가들이 동원되어 그린 조선
통신사의 인물도 그들 눈에 위풍당당하고 자긍심이 넘치는 모습으로 비추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통신사 행렬도 중
‘전통무’를 보여주는 장면의 일부이다. 이 그림 그대로의 전통무가 현재 일본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그런데,
조선통신사가 재정문제로 반대에 부딪쳐 1811년 마지막에는 대마도까지만 갔다가 되 돌아 갔다. 그 이후에는 조선통신사 행렬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끄는 흑선이 온 것이 그로부터 50년
후다. 조선통신사 교류가 유일한 대외 접촉이었던 쇄국일본은 조선을 통한 대륙문화 흡수에서 영?미 등 해양문화를 빠르게 흡수하면서 문화선진국
조선을 금방 잊어버리고 만다.
☞ 조선통신사 부활
1868년 일본은 德川막부를 쓰러뜨리고 明治유신을 거치면서 德川막부가 한 일은 모두
무시된다. 德川家가 좋아하여
200년 이상 해오던 조선통신사 외교도 역사 속에 파묻히고 많은 자료가 소멸되고 만다. 당시는 征韓論 대두될 때라 조선(韓)의 선진문화의 도입을
이야기하는 조선통신사는 明治의 대외정책과 맞지 않게 되었는지 모른다.
 토쿠가와
이에야스
(德川家康).
明治 이후의 일본은 세계 2차대전의 패전으로 망할 때까지 근린국의
침략과 확대 정책이 지속된다. 이는 마치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등 확대 정책과도 유사하다. 그로부터
1945.8.15 패전으로 근 80년간 계속된 일본의 침략정책이 종지부를 찍게 된다. 일본은 다시 德川 시대의 정신으로 되돌아간 듯 하다.
선린우호의 정신, 外征보다 內政에 힘쓰던 德川의 시대를 찾게 된다. 이로 인해 조선통신사에 대한 역사 자료가 발견되기 시작한다.
 조선통신사 행렬 두루마리의 일부분.
(나가사끼현 지정 문화재) 대마도 역사민속자료관에 전시되어 있다.
지금부터
30년 전에 일본의 여러 절에 奉獻되어 보관되어온 조선통신사의 두루마리 그림이며, 병풍 등이 발견되었다. 조선의 관리와 그들을 호위하는 일본의 무사, 가마를 메고 짐을 나르는 일본의 서민들 그리고,
연도에 수많은 일본인들이 그려진 조선통신사 행렬도가 곳곳에서 발견돼 당시 조선통신사의 행렬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일본인들이 그려 보관해온
조선통신사 기록그림.
 ‘조선국신사회권(朝鮮國信使繪卷)’
(대마역사민속자료관장) “ 길을 비켜라. 조선에서 오신 통신사 지나신다! “
제일 먼저 나서는 것은 기수단이다. 길을 비켜라는 의미의 淸道旗. 그리고 조선국왕의상징인 龍旗가 나간다. 그리고 악대다. 일반적으로 취타대라고 불리는 각종 악기를 연주하면서 당당히 지나간다. 나발, 태평소, 대금, 해금,
징, 바라, 북 등 입으로 불고 손으로 치면서 연주하는 악대가 지나가면 국서(금서)함 행렬이 뒤따른다.
 일본
호위무사의 경호를 받으며 가마에 앉아 늠름하게 입성하는 조선 관리의 모습.
국서함은 조선국왕이 德川家에게 보내는 외교문서이다. 국서함을 둘러싸고 군관,
사령이 지나간다. 그 후 正使행렬이 지나간다. 차양이 되어 있는 가마에 朝服을 단정히 입은 정사가 앉아 있다. 일본인 가마꾼 8명 외 기수,
역관, 사령 등이 따른다. 그 뒤로 副使 및 從事官 행렬이 지나간다. 사이사이에 일본의 경호무사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 조선시대의
“한류"
조선통신사는 조선의 선진문화를 일본이 받아들인 것으로 당시 조선으로서는 자신들에게 침략을 자행한 일본민족에게 성의를 다한
것으로 보여진다. 학자들은
조선정부가 조선통신사를 파견하여 그 후 200여년간 한?일간의 평화가 유지된 것은 일본의 침략 즉 武에 대해 조선이 선진적인 文으로 대응한
것으로 보고 조선민족의 아량과 우수성이 입증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통신사 행렬은 문화교류의 의미있는 역사적
이벤트였다.
특히 대마도에 근무하면서 대조선 외교를 담당했던 당시 일본제일의 朝鮮通 이었던 아메노
모리호우슈(雨森芳洲)는 그 자신이
2번씩이나 조선통신사의 안내역을 맡아 에도까지 수행하는 등 당시 조선과 일본은 조선통신사를 통해 우호증진을 꾀하고자 노력하였다.
조선도 조선통신사를 통해 일본의 사정을 알게 된다. 우리나라에 고구마를 소개한 조엄도 1764년 조선통신사의 정사
자격으로 일본을 다녀오면서 고구마를 전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통신사는 초기 정치적 목적에서 차츰 문화사절의 내용을 띈다. 일본의
유교문화며 에도시대의 높은 문화가 조선통신사를 통해 들어왔다고 한다.
 (조선통신사를
보려고
거리로
몰려나온
환영인파.) 통신사의 행렬에는 반드시 음악이 연주되었고 또한 무용도
행해졌다. 음악관계 수행원은 평균 약 50여명에 이르렀다. 음악인들은 각지에서 의식으로써의 음악을 연주하였고, 따라서
궁중음악의 악장에 해당하는 전악(典樂)외에 취고수와 세악수의 악대가 수행했다.
당시
일본사람들의 조선통신사에 대한 열열한 환영은 지금의 한류 즉 “겨울 소나타(겨울연가)”의 배용준, “욘사마”의 붐에 못지 않았다고 보인다. 당시
일본 사람들이 기록용으로 그려놓은 두루마리 그림을 보면 조선통신사를 보기위해 연변에 들어선 일본 사람들이 빽빽하다. 특히 지금의 토오쿄, 당시
에도의 중심거리는 조선통신사가 지나가기 하루 전부터 자리를 잡으려고 아우성이었다 하고, 조선통신사가 지나갈 때 구경나온 일본인들의 진지한 모습이
남아있는 그림은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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