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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의 얼이 서려있는 역사와 문화의현장 강화도를 체험하는 색다른 자전거 체험여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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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고도이며 개국의 성역인 강화도의 문화유산을 간직한 강화도....
강화군은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렸던 마니산 참성단과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을 비롯한 선사시대의 유물인 고인돌이
곳곳에 산재되어 있으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고려시대의 팔만대장경 및 금속활자, 고려시대 대몽항쟁 39년간 도읍지인 고려궁지와 국보 제133호로 지정된 고려청자가 출토된 지역이며 고려자기 등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던 고려의 유적지 입니다.
이후 조선시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시 인조임금의 피난수도 이기도 했으며 조선말기에는 대원군의 쇄국정치와 천주교의 탄압으로 빚어진 프랑스 함대의 침입 사건인 병인양요, 그리고 신미양요의 전적지 광성보와 초지진을 포함한 5진 7보 53돈대의 국방유적, 그 후 운양호 사건으로 강화도 조약체결 등 풍운을 겪어낸 역사의 산실로 고대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련과 역경을 이겨낸 호국의 얼이 서려 있는 지역이며 강화도전역에 14개의 대소사찰과 103점의 문화재를
간직한 역사의 고장입니다.
또한, 세계 5대 갯벌에 속한 강화도 남단갯벌은 자연생태계의 보고이며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지구로 저어새, 노랑부리 백로, 검은머리물떼새 등 철새 도래지로도 유명합니다.
자랑스러운 문화유적을 간직하고 있는 강화도 자전거를 이용하여 문화유적을 체험하는 색다른 체험여행을 마련합니다.
이 시간을 통하여 소중한 현장체험과 자전거 레저 스포츠 활동을 통해 건전한 사고와 건강한 체력을 길러주며 내성적인 청소년들에게 활발하고 명랑한 성격과 자신감을 갖게 해주는 교육효과도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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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본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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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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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가대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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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방코스 |
□ 고려궁지 - 지석묘 - 봉천대·교산리 고인돌군
□ 역사관·갑곳돈대 - 용진돈대 - 광성보(사적 제227호) - 덕진진(사적 제226호) - 초지진(사적 제225호) - 전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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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내용 |
왕복교통, 자료집, 자전거임대(1일간), 숙식비(2박 6식), 여행자보험, 모자, 음료, 명찰, 유적지입장료 등 일체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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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가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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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
중, 고등학교 |
대학생, 학부모 |
일반 참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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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후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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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후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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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후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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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단원 참가자 (연회비 납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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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후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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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후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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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후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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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제,남매, 자매, 가족등이 함께 참가할 경우는 참가비 할인혜택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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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집인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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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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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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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준비물 |
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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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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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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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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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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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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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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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킹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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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수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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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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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공급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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썬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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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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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외선 차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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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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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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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그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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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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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외선 및 햇빛 차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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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형배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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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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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피가 중간 정도인 것 (방수커버- 방수가능, 가볍고 질긴 것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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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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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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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외선 차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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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장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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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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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보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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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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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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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제거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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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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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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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덩이 깔개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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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장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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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참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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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보호 (겨울용 스키장갑 좋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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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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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참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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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가운 날씨에 체온 보호
- 스키용 마스크가 좋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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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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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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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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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용 타올 좋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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칫 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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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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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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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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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 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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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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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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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셔츠
(긴팔,반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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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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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천시 체온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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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 지
(긴,반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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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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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천시 체온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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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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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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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천시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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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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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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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용은 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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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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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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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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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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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용 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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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닝 / 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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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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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의약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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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통, 소화제, 멀미약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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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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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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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 후 피부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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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용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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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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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당 20,000원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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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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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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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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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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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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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정 |
(현지 사정에 따라 약간 조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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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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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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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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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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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 ~
12:00 ~
12:00 ~ 13:00
13:00 ~ 17:30
17:30 ~ 18:00
18:00 ~ 19:00
19:00 ~ 22:00
2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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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출발
강화도 도착
점심식사 (개별 준비)
강화유적지 탐방 (버스탐방)
숙소도착 / 휴식
저녁식사
개인 자유시간
취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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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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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0 ~ 07:30
07:40 ~ 08:30
09:00 ~ 12:00
12:00 ~ 13:00
13:30 ~ 16:00
16:30 ~
18: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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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 / 아침운동
아침식사 및 출발준비
오전 자전거 체험여행 (자전거 인수 및 준비운동)
- 강화도 주요유적지 탐방
점심식사
오후 자전거 체험여행
- 강화도 주요유적지 탐방
강화도 출발
서울도착 예정 및 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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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해안순환자전거도로
새로 생긴 근사한 자전거전용도로. 강화대교 건너 강화 역사관 앞에서부터 해안을 따라 광성보까지 이어지는 10km의 평탄한 코스.
왼쪽으로 염화강이 흐르고 조금 더 가면 서해바다가 나타난다.
자동차도로와 자전거 도로가 완전 분리돼 안전하다. 주변 논밭 등 자연경관과 유적지를 감상할수 있다.
수도권 최대의 섬 강화도는 이제 더 이상 섬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강화도를 훌쩍 넘어 좀더 한적한 섬 석모도로 간다. 외포리 선착장에서 눈앞에 보일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어 섬다운 고적함은 덜하지만 석모도의 정취는 어느 곳에 비해도 모자람이 없을 만큼 빼어나다.
또 이정재·전지현 주연의 영화 <시월애>의 무대이기도 했던 이곳은, 서해 일몰의 장관을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최근에는 연인들의 발걸음이 부쩍 늘어 자전거 하이킹 코스나 드라이브 코스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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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하이킹 코스 |
제 1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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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미널 - 역사관·갑곳돈대 - 용진돈대 - 광성보(사적 제227호) - 덕진진(사적 제226호) - 초지진(사적 제225호)- 전등사 - 함허동천 야영장 -
정수사 - ·동막리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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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간에는 해안순환 자전거 전용도로가 (역사관에서 광성보까지 약 10Km)있다.
좌측으로 염화강이 흐르고 있으며 우측으로는 논밭이 펼쳐져 있고 노면은 평탄하고 경관이 아름답고 공기가 맑은 하이킹 하기가 제일 좋은 코스입니다. 편도 소요시간은 쉬지 않고 보통 속도로 달리면 1시간 30분정도 소요됩니다. 하이킹도 즐기고 유적지 탐방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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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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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미널 - 용흥궁(철종이 살던 집) - 고려궁지 - 지석묘 - 봉천대·교산리 고인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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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간은 짧은 완만한 고개가 있으며 고개를 넘어서면 평탄한 구간이며 지석묘 탐방을 원하시는 분이 선택 하시면 좋겠습니다. (편도소요시간 : 약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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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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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미널 - 선원사지(팔만대장경 판각지) - 철종외가 - 호국교육원 - 곤능 - 석능 - 전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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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구 간중 호국 교육원부터 전등사 구간은 차량통행이 적은 지역으로 하이킹하기 좋은 코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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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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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미널 - 찬우물약수터 - 안양대학교 예정지 - 인산리저수지 - 외포리 여객터미널 - 카페리호이용
(도선시간 10분) - 석모도 (석포리 포구) - 보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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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간은 외포리 선착장 까지는 비교적 좋은 코스이나 석모도 구간은 가파른 언덕길이 길게 있어 여성분은 고려하여야 코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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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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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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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코스
(해안도로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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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역사관) → (3㎞:3㎞) → 용진진 → (6㎞:9㎞) → 광성보 → (2㎞:11㎞) → 덕진진 → (1.7㎞:12.8㎞) → 초지삼거리 →
(0.7㎞:13.5㎞) → 초지진 → (1㎞:14.5㎞) → 황산도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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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1확장코스
(길상남단순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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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지진 → (1.3㎞:1.3㎞) → 장흥저수지 → (2.7㎞:4㎞) → 동검리연륙교 → 동검도 해양생태계관찰 → 동검연륙교 → 가천의대 → 선두항선착장 → 택지돈대 → 선두4리선착장 → 선두포수로낚시터 → 강남중학교 → 길정저수지 → 이규보묘 → 불은면
두운리 → 해안도로 → 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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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2확장코스
(화도남단순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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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지삼거리 → (4㎞:4㎞) → 전등사 → (5㎞:9㎞) → 이건창생가 → (0.7㎞:9.7㎞) → 함허동천야영장 → (1㎞:10.7㎞) → 분오
저수지,분오리돈대 → (0.5㎞:11.2㎞) → 동막해수욕장 → 해양생태관광지 → 카페리도선장 → 선수횟집촌 → ( ㎞) → 마니산
국민관광지 → ( ㎞) → 길상면 온수리,길직리 → 불은면 덕성리 → 덕진사거리 → 해안도로 → 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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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코스
(48번국도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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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역사관) → (4㎞:4㎞) → 강화읍(용흥궁,고려궁지,김상용순절비,북문,강화산성,약수터,서문,연무당옛터,남문) → (3㎞:3㎞) → 진고개 → 강화곤충농원 → 은암자연사박물관 → 석조여래입상 → 오층석탑 → 심은미술관 → 창후리포구(황복마을) →
돈대 → 철새탐조 → 되돌아서 배수갑문 → 삼거천 뚝길따라 → 하점면 부근리까지(하점우체국) → 세계문화유산 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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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지도 (그림을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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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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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여요금 |
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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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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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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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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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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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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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간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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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간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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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전거대여점 |
1. 강화하이킹 자전거 대여점 : 032)933-3692, 011-781-3692
- 위치 : 강화역사관 매표소 뒤 매점.
2. 강화자전거랜드 : 032-933-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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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광지 요금안내 |
관 광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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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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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린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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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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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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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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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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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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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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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
|
1,300
|
1,100
|
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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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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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0
|
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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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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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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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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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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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
|
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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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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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0
|
900
|
700
|
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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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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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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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
|
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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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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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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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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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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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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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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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적지 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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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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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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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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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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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관,고려궁지,광성보,덕진진,초지진통합 당일 한 유효
※ 구입처는 위 5곳 어느 매표소에서나 구입가능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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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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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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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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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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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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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지 안내 |
◈ 강화역사관
강화역사관은 강화대교 지나 우측 갑곶돈대 안에 위치해 있습니다. 구석기시대 이후로 현재까지의 역사, 문화유적이 산재하여 지붕없는 박물관으로 불리는 강화에 대해 일반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1988년에 완공되었으며 2층 4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2층에 올라가면 창 밖 해안순환도로 왼편으로 강화외성터가 흙길처럼 보입니다. 역사관 앞 잔디밭에는 무동력선으로 유명한 강화 젖새우를 잡았던 해선망 어선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역사관을 나와 왼편으로 가시면 400년 된 갑곶리탱자나무가 있습니다.
갑곳리탱자나무는 강화도가 우리나라 서해안에서 탱자나무가 자랄 수 있는 북쪽 한계선이 됨을 입증하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강화도에 탱자나무를 심게 된 이유가 성벽 밑에 심어 철조망과 같은 역할을 하여 적병의 접근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이 탱자나무는 우리 조상들의 국토방위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유물이기도 합니다.
탱자나무는 강화도가 북한계선이며 전체가 하나의 요새역할을 했던 강화도에서는 성 아래에 심어져 적군이 성을 기어오르지 못하게 하는 철조망의 역할을 했습니다. 계단을 올라가면 외적의 침입당시 조선군의 주력무기였던 홍이포가 전시되어 있으며 갑곶돈대가 복원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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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곶진 (갑곶돈대)
강화읍 동단에 위치하여 강화 대교를 사이에 두고 김포 문수산이 바라보이는 곳으로 한강으로 드나드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가 1232년부터 1271년까지 39년간 강도에 도읍을 옮겨 몽고에 줄기찬 항전을 계속할 때 이곳은 강도의 외성으로 강화 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이며, 세계를 재패한 몽고군이 수차의 침공으로 빤히 바라다 보고도 발을 구르다 되돌아간 곳이다. 갑곶진이란 이름의 유래를 보면 "우리 군사들의 갑옷만 벗어 메워도 물길을 건널 수 있다. "라고 몽고군은 발을 구르며 안타까와 했다.
그래서 갑옷(甲) 궬곳(串)자를 넣어서 甲串이라는 이름으로 불러 왔다는 설도 있다. 1656년 강화에 여러진이 설치될 때 제물진에 소속된 돈대로서 돈대의 축조는 300여년 전인 1679년에 이룩되었다. 갑곶 돈에는 8문의 대포를 설치한 갑곶포대가 있었다.
1866년 9월 7일 병인양요때 로즈제독이 지휘하는 프랑스 연합함대가 6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곳에 상륙하여 강화성 문수산성 전투에서 양헌수 장군이 거느린 용맹한 조선군의 습격을 받아 10월 13일 패주하고 말았다. 이곳은 옛 강화의 관문이며 한강을 지키는 중요한 보첩이다. 돈대내에는 고려시대에 몽고와 외교관계를 맺던 이섭정이 있고 조선시대의 대포가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그 뒤에도 교역을 표방한 서구의 침략세력이 선박을 이용 접근할 때 이 천연 요새에는 양이와 싸우지 않는 것은 화친을 뜻하는 것이요 매국적 행위라고 단정 목숨을 걸고 싸웠다. 이곳에 피뿌린 우리 선조가 얼마이며 이곳에 쓰러져간 우리 어버이가 그 얼마이던가? 강물은 흘러 말리 없고 그 자리는 고 박대통령의 분부로 복원 정화되어 교훈장으로 전하고 있으나 이 곳을 지나는 손이여 옷깃을 여미고 저들 무명의 촌부와 병사들 앞에 머리숙여 진정한 애국의 충혼을 배움직 하지 않은가! 지금은 김포를 연결하는 694m 의 강화대교가 이 역사의 현장을 가로 질러 놓여 있으나 저들의 고귀한 죽음은 만고에 푸르리라.
유수 홍중보가 세운 것이다. 남으로 용진까지가 2400m로 소관 돈대는 망해, 제승, 염주, 갑곶 등 네곳이다. 배치 인원은 병마 만호 1명, 군관 36명, 사병 100명, 돈군 24명이다. 군량미 157석, 첨향미 103석, 간장 6독, 진선 8척, 군기와 군용품 약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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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지진
이곳은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 (1656)에 구축한 요새이다. 고종3년(1866) 10월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침입한 프랑스군(로즈)극동함대 및 고종 8년(1866) 4월에 통상을 강요하며 내침한 미국(로저스)아세아 함대, 고종 12년(1875) 8월 침공한 일본군함 운양호와 치열한 격전을 벌인 격전지이다.
당시 프랑스와 미국, 일본의 함대는 우수한 근대식 무기를 가진데 비해 우리 군은 사거리도 짧고 정조준도 안되는 열세한 무기로 외세에 대항해 싸웠던 것이다. 특히 일본군함 운양호의 침공은 고종 13년(1876)에 강압에 의한 강화도 수호조약(병자수호조약)를 맺어 인천, 원산, 부산항을 개항하게 되고 또한 우리 나라의 주권을 상실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이 진에는 병마첨절제사 1인, 군관11인, 군사 320인, 전선 3척이 주둔하고 있었다 한다.
- 이곳은 민족시련의 역사적 현장으로 애국애족 및 호국정신의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1973년 성곽을 보수하고 당시의 대포를 전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국방유적으로서의 초지진
강화의 동남단 길상면 초지리에 위치하고 사적 제 22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김포군 대명리와 마주 보이는 곳이다.
300년전 1656년 진이 설치되고 1679년 초지돈 장자평돈 섬암돈이 축조되어 이진에 소속되었다. 그리고 6문의 포가 설치된 황산포대와 12문의 포가 설치된 진남포대가 있었다. 진장으로 1666년에는 병마만호가 있다가 1763년에는 첨사가 있었고 군관 11명 사병 98명 돈군 18명에 배가 3척 배치되어 있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일본 군함 운양호 침공등 근세까지 줄기차게 싸운 격전지이다. 1871년 4월 23일 미국 로저스가 지휘하는 아시아 함대가 1230명의 병력으로 침공할 때 450명의 육전대가 초지진에 상륙하여 덕진 광성의 제진을 공략하였다.
1875년 8월 21일 일본 군함 운양호가 초지진 포대와 격렬한 포격전을 벌여 싸운 강화도 조약의 시효진이다. 성축과 홀로남은 노송에는 당시의 포탄자국이 남아있다. 그리고 전 함대에 맹포격을 가했던 대포 일문이 1973년 문화재관리국에 의해 당시의 격전지인 길상면 초지진에 옛 모습 그대로 옮겨져 사학가는 물론 관광객의 눈길을 끌고 있다.
이 대포는 길이 2.32m 입지름 40cm의 거포로 일정때 일본 모 고관이 뜯어다 자기 별장에 기둥 밑받침으로 쓴 것을 해방 직후 고 장택상씨가 소장한 것으로 장씨의 현관 기둥으로 보관하다가 그의 아들이 초지진 복원소식을 듣고 기증한 것으로 오늘까지 남게된 유서깊은 유물이다. 1644년 유수 홍중보가 창설한 곳이다. 1666년 현종 때 유수 서필원이 병마 만호로 수직할 것을 상주 하였더니 1763년 영조대에 와서 유수 정실 이 첨사 겸 감목관을 보내 수직하게 하였다. 배치인원은 병마첨절제사 1명, 군관 11명, 사병 98명, 돈군 18명, 목자 210명, 군량미 106석, 첨향미 103석, 간장 6독, 군기와 군용품 약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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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성보
광성보는 조선 효종 9년(1658)에 설치 되었으며, 숙종 5년(1679)에 용두돈대, 오두돈대, 화도돈대, 광성돈대 등 소속돈대가 축조되었다. 영조 21년(1745)성을 개축하면서 성문을 건립하고 안해루(按海樓)라는 현판을 달았다. 고종 3년(1866) 프랑스의 극동함대와 치열한 격전(병인양요)을 치르었으며, 고종 8년(1871) 신미양요당시 미국의 아세아함대가 이 성을 유린하였으며, 우리 수비군은 탄환 및 화살이 떨어지자 어재연장군 이하 전 장병이 백병전으로 맞서 용감히 싸우다 전인원이 장렬히 순국한 곳이다.
광성보 내에는 신미양요시 순국한 순무천총 어재연, 동생 어재순의 쌍충비와 무명용사들의 합장 묘인 신미순의총 그리고 1977년 전적지를 보수하고 세운 강화 전적지 보수 정화비 등이 있다.
::: 국방유적으로서의 광성보
광성보는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해안에 소재하고 있으며김포와 마주보고 있다. 고려시대의 성을 1618년(조선 광해군 10년)에 외성을 보수하고 1656년 광성보를 설치했다. 이 보의 돈대는 1679년에 축조된 것이며 오두돈, 화도돈, 광성돈대와 오두정 포대가 이보에 소속되었다. 그러나 완전한 석성으로 개축된 것은 1745년이다.
이곳은 신미양요의 가장 격렬했던 격전지로서 1871년 4월 미국의 로저스가 통상을 표방하면서 아세아 함대를 이끌고 1230명의 병력으로 침략하였을 때 상륙부대가 초지진 덕진진을 점령한 후 광성보에 이르러 백병전을 전개하였다. 조선군 지휘관인 어재연 장군이하 전용사가 용감하게 싸웠는데 포탄이 떨어지면 칼과 창으로 싸우고 칼과 창이 부러지면 맨주먹으로 싸워 한사람도 물러서거나 포로가 되지 않고 모두 장렬히 순국하였다.
당시 미국의 병기는 9인치 포와 8인치 포등 85문의 대포와 최신무기로 남북전쟁과 스페인 전쟁을 겪은 백전노장인 1230명의 정예군인데 비해서 우리 조선군은 심지에 불을 당기는 화승포 3문과 구식장총 몇 정과 화약 4000근 군량미 100석에다 300명 미만의 전투 경험이 적은 미약한 병력이었다.
이후 미군들은 물리전에는 이겼으나 정신전에는 졌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신미양요때 성책과 문루가 파괴된후 폐허가 되어 있는 것을 1977년 광성돈, 안해루, 용두돈과 59명의 무명용사의 신미순의총, 어재연장군 형제의 쌍충비각들이 보수 정화되었다.
병인양요 당시 순무중군인 어재연 장군이 「우리는 이제 피할 곳도 없다. 적병은 이 포대를 좁혀오니 죽기로써 싸워라」고 독전하여 앞장서서 싸웠으며, 이때에 군인도 아닌 동생 어재순이 달려와 합세하려 하므로 형 어재연 장군이 말하기를 「군인은 군인의 갈길이 따로 있으니 너는 어서 네 갈길로 가거라」하고 말하니까 「나라가 위급한 이때에 어디를 갑니까?」하고 합세하여 전군을 지휘하며 분전하다가 두형제가 순국하였다.
이두 형제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하여 쌍충비각을 세우게 된 것이다. 무명 용사의 신미순의총은 광성보안에 있는 쌍충비각에서 좀 떨어진 아래 등성이에 있다. 1871년 신미양요때 용감하게 적과 싸우다 순국한 59인의 이름없는 무명용사들을 7개의 분묘에 합장한 것이다.
천연의 요새 용두돈대는 광성보 성문에서 고개를 넘어 10분쯤 가면 바다로 용의 머리처럼 쑥 들어낸 돌출부의 암반위에 세워진 절묘한 돈대로 언덕에서 내려다 보면 한폭의 그림같이 아름답다.병인 신미양요때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져 성곽이 파괴되었던 것을 1977년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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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진진
이 진은 원래 고려시대에 강화해협을 지키던 외성의 요충지로 조선 효종 7년(1656)에 축조된 것이다. 조선 숙종 5년(1679)에 축조된 덕진돈대, 남장포대, 덕진포대가 이 진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 진에는 숙종 3년(1677)만호를 두고 군관 26명, 병100명, 돈군12명, 군선 2척이 배치되어 있었다. 고종 3년(1866) 병인양요시 프랑스 극동함대와 고종 8년(1871) 신미양요시 미국의 아세아 함대화 치열한 격전을 벌인 곳이다.그간에 무너진 성곽과 문루를 1976년 복원 정화 하였다.
덕진진에는 강화제일의 남장포대와 덕진돈대가 있으며 바닷가에는 경고비가 서있습니다. 남장포대에는 15문의 대포가 있었다고 전하는데 현재는 7문을 전시중입니다. 남장포대를 지나 계단을 올라가면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이 강화읍을 점령하여 양헌수 장군부대가 야음을 틈타 강화로 들어왔던 덕진돈대가 있습니다. 덕진돈대를 지나 왼쪽아래 계단으로 내려가면 바다를 향해 비석이 서 있는데 이것이 경고비입니다. 바다의 척화비라고도 불리며 외국의 배가 우리해역으로 들어오지 말 것을 경고하는 비석으로 염하강을 지키고 있습니다.
::: 국방유적으로서의 덕진진
남으로 초지까지 2km이다.
옛적에는 첨사가 있어 수영에 예속하였으나, 1666년 현종때에 유수 서필원이 주청하여 첨사제를 없애고 별장을 두는 한편 첨사는 통진월편으로 보냈고 1677년 숙종 때에 유수 허질이 만호로 올리고 진의 이름을 덕진이라 했다. 배치 인원은 만호 1명, 군관 26명, 사병 100명, 돈군 12명, 군량미 116석, 콩 26석, 첨향미 103석, 간장 5독, 진선 2척, 군기와 군용품 약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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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등사 대웅전
단군왕검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을 간직한 삼랑성내에 아늑히 자리잡고 있는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72)에 아도화상이 처음 창건하고 진종사(眞宗寺)라 이름 지었습니다. 그후 고려 충렬왕비 정화궁주가 이 절에 귀한 옥등을 시주했다해서 전할전, 등불등자(傳火登)를 써서 전등사로 개명한 사찰입니다.
이절의 입구에 있는 대조루 밑을 지나들어가면 정면에 보물 제178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웅보전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대웅전 안에는 1544년 정수사에서 판각되어 옮겨진 법화경 목판104매가 보전되고 있으며 정화궁주의 시주물로 전해 내려오는 청동수조와 옥등이 남아 있기도 합니다.
명부전 맞은편 왼쪽 언덕을 약100m 오르면 조선 왕실의 실록을 보관했던 정족산 사고터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처음 강화에는 마니산에 사고를 설치하였다가 1660년 이곳 전등사 경내로 옮겨 1678년이래 서적을 보관하였고 그후 전등사는 사고를 지키는 사찰로서 왕실의 보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경내에 있는 보물제393호 범종은 중국종으로 중국 하남성의 숭명사에서 북송시대(1097), 고려 숙종2년에 주조된것으로 우리나라 종과는 달리 종머리에 음관이 없고 용머리 주위에는 아름다운 16개의 연잎이 둘려 있는것을 볼수 있으며 견대와 요대사이에는 8괘가 둘려있어 특이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1866년 병인양요때는 승군 50명이 전투에 참가 하기도한 호국 불교의 사찰로 당시 조선수비대장이던 양헌수 장군 승전비가 전등사 동문 입구에 세워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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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궁지
고려는 고종 19년(1232) 6월, 몽고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최우의
권유로 도읍을 송도에서 강화로 옮겼다. 이때 옮겨진 도읍터가 고려궁지로 원종 11년(1270) 환도할 때까지 39년간 사용되었다.
고려궁지는 규모는 작으나 송도 궁궐과 비슷하게 만들어졌고, 궁궐 뒷산 이름도 송악이라 하여 왕도의 제도를 잊지 않으려 하였다고 한다.
그 후 여러차례의 전란을 겪으면서 고려궁지는 그 모양이 많이 변화되었고, 현재는 조선시대 건물인 승평문, 강화유수부 동헌, 강화유수부 이방청, 종각, 외규장각 등이 복원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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