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단은 신라의 화랑정신을 계승하여 미래의 조국을 이끌어 갈 인재를 양성하고자 합니다.
화랑도 기원 및 재정 설치연대 화랑도의성격 화랑도의 의의 관 창 김유신 삼강이란 오륜이란


 

화랑도

화랑도는 신라시대 화랑을 중심으로 단체 정신이 매우 강한 청소년 집단으로서 청소년 수련단체. 청소년 집단으로서 교육적,  군사적, 사교 단체적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기원 및 제정
신라는 4세기 중엽을 하나의 경계로 하여 급속히 국가체제를 정비해갔다. 따라서 촌락 중심의 청소년 조직은 그 성장 발전에 있어서 커다란 지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더욱이 주앙집권 체제의 정비와 더불어 신라사회에 점차 친족적인 사회조직이 생성 강화되어 간 것은 그 추가적인 저해요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6세기 들어 우경이 전국적으로 보급됨에 따라 빈부의 차가 생겨 촌락공동체간의 균형이 파괴되었으며, 군현제의 시행으로 공동체의 독자적인 성격마저 중앙정부에 의해 흡수되기 시작하여 종전 청소년 조직은 발전하지 못하고 쇠퇴되어 갔다.  이런 상태에서 중앙 정부에 의하여 제정된 것이 화랑도의 전신인 원화제도이다.

화랑도는 처음에 남모(南毛)와 준정(俊貞) 두 미녀를 뽑아 이를 원화라 하였다.  이들을 중심으로 조직하여 300여 명의 무리가 모였으나 이 두 여단장은 서로 시기하다가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유인하여 억지로 술을 권해 취하게 한 뒤 강물에 던져 죽여 버렸다.
이 일이 발각되어 준정도 사형에 처해지고 그 무리들도 화목을 잃어 해산하였다.  그후 나라에서는 귀족 출신의 외양이 잘 생기고 품행이 곧은 남자를 뽑아 곱게 단장하여 이름을 화랑이라 하여 받들 게 하자 무리가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이로써 화랑도에는 그 지도자에 화랑이 있고 그 밑에 낭도가 있었는데 초기의 화랑도는 조직도 미미한 것이었으나 576년 이후 국방정책과 관련하여 이를 관에서 운영하게 되면서 총지도자에 국선(國仙)을 두고 그 밑에 화랑이 있어 각각 문호(門戶)를 맡았다.
화랑도의 총지도자인 국선은 원칙적으로 전국에 1명, 화랑은 보통 3~4명에서 7~8명에 이를 때도 있었으며 화랑이 거느린 각 문호의 낭도는 수천명을 헤아렸다

 

 

설치연대

<삼국사기>에는 진흥왕 37년(576년)이라 하였으나 562년에 이미 화랑 사다함이 대야성을 공격하여 큰 공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음으로 보아 신라는 이때에 이르러 이전부터 있었던 미비된 상태의 청소년 집단이던 화랑도를 국가조직 속에 편입시켜 무사단의 성격으로 강화시틴 것으로 보인다.

 

 

화랑도의 성격

화랑도는 그 독특한 무사도로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삼국사기>에 수록된 화랑들의 전기를 보면 이 시대에는 화랑뿐 아니라 낭도나 일반 병졸에 이르기까지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는 무엇보다도 전사를 명예로 여기는 무사도의 정신으로 가득차 있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다만, 전쟁터에 있어서 뿐 아니라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화랑집단의 성원들은 목숨을 가볍게 여겼으며 이러한 무사도는 특히 화랑 출신의 장군들이 모범을 보였다.

660년 백제를 치기 위한 원정군의 주요한 장수로는 김유신을 비롯하여 그의 아우인 흠순과 품일 등이었는데, 황산 벌판의 싸움에서 품일과 흠순은 신라군의 사기를 드높이기 위하여 각기 아들인 화랑 관장과 반굴을 전사하게 하였다.  
김유신은 그뒤 672년(문무왕 12년)에 그의 아들 원술이 석문전투에서 당군과 사워 패전한 끝에 살아서 돌아오자 왕며을 욕되게 하였을 뿐 아니라 가훈을 저 버렸다는 이유로 그를 죽일 것을 왕에게 탄원한 적도 있다.
비록 원술은 왕의 비호로 목숨을 구하였으나 그뒤로는 감히 아버지를 볼 수 없었으며 아버지가 죽은 뒤에는 어머니를 만나려 하였으나 끝내 어머니가 거절을 하였다.

화랑도의 수련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노래와 춤이었다.  본래 노래가 정신교육에, 특히 정소년의 의기를 북돋우는데 이바지 하였으며 다른 민족의 청소년 집단이나 전사조직과 마찬가지로 가무조합으로서 일면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화랑도의 노래와 춤은 그들의 명승지 순례와 더불어 놀이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물론 화랑도의 국토순례라든지 노래와 춤이 어떤 실제적인 목적에서 떠나 다만 즐기기 위한 목적으로 행해진 것은 아니었으나 역시 놀이의 성격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아니었다.

놀이의 사상은 직(直)과 예(禮)의 균형 조화를 강조한 유교의 예악 사상과도 서로 통하는 바가 있는데 화랑도의 인격형성이나 나가서는 그 세계관 형성에 이 놀이의 성격이 내포되어 있는 점이 흥미있는 사실이다.

또한 화랑도는 불교의 미륵신앙과 결부되어 있는 점이 주목된다.  그 수령인 화랑은 도솔천에서 하생(下生)한 미륵으로 여겨졌을 뿐 아니라 그 집단 자체가 미륵을 쫓는 무리로 일컬어졌다.
화랑도 자체를 미륵신앙에 의하여 결합된 동신자 집단으로 보고 있기까지 한 것이다.  나아가 화랑도가 가장 활기를 띤 600년을 전후한 시기에 특히 많이 만들어진 미륵반가사유상이야 말로 바로 화랑집단이 찾고 있던 미륵의 모습일 것이라는 견해마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화랑도의 의의 (기능과 역할)

당시 신라 조정이 화랑도 제정을 서두른 것은 핵심이 되는 군대를 보충할 수단으로써 그것이 당장 필요했을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는 이를 통해서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화랑도는 이처럼 궁극적으로는 인재를 양성한다는 교육기관의 임무를 띠고 출발한 제도였으나 법률로서 제정된 정식 국가기관은 아니었다.  이것은 종전에 있어서의 촌락 공동체적인 청소년 조직의 전통과 중국 율령(律令)의 도입을 통해서 배운 관청조직의 원리를 교묘하게 결합시켜 만든 일종의 반관반민(半官半民)의 성격을 띠는 조직체였다.

화랑도는 삼국항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기 시작한 진흥왕 때 제정되어 삼국통일을 이룩할 때까지 한 세기 동안에 걸쳐 크게 활기를 띄었다.화랑도는 이 중대한 시기에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많이 배출하였다.
고구려와 백제를 상대로 하여 100년이라고 하는 오랜 기간에 걸쳐 전쟁 상태에 돌입해 있던 신라가 국가적 위기에 화랑도는 전사단으로서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들은 사태가 중대한 때에는 곧바로 군부대에 배속되어 작전에 동원되었으며 수련기간이 끝난 뒤에는 국가의 정규부대인 당(幢) 정(停)에 편입되어 정식 군인으로서 활동하였다.

화랑도는 화랑도의 무사도가 화랑집단의 구성원 사이에서 뿐만아니라 일반 평민층에까지 널리 퍼져서 시대 정신의 구현에 이바지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화랑도는 다만 군사적인 면에서만 신라 국가에 이바지한 것은 아니었다.  화랑도 조직은 매우 의협심이 강한 집단으로서 약한 자를 도와주는 것을 서슴치 않았고, 때로는 사회질서의 안녕을위하여 마을의 야경을 맡기도 하였다.

그러나 화랑도의 역할은 이런 일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화랑도가 제정되어 크게 활동하던 시기는 바야흐로 골품제도라고 하는 신라 고유의 신분제도가 확립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가던 때였는데, 화랑도는 이러한 신분계층 사회에서 발생하기 쉬운 알력이나 갈등을 조절, 완화하는데 부분적으로나마 기여하였다.
그것은 화랑도가 진골귀족을 비롯하여 하급귀족, 일반평민 출신 등 여러 신분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면서도 그 집단 자체는 어디까지나 국가에 대한 충성과 애국을 강조하는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관창(645년~660년) - 선덕여왕 14년 ~ 무열왕 17년

신라 무열왕 때의 화랑. 신라 좌장군 품일의 아들. 어려서 화랑이 되어 순련을 쌓아 15세 때에 이미 말타기, 활쏘기에 능했다.  
660년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칠 때 황산벌(지금의 충청남도 논산군 연산)에서는 신라군과 백제군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졌다.  이때 백제의 계백 장군이 결사대 5천 명을 거느리고 뛰어난 전략으로 대항해왔다.

신라군은 용기를 잃고 여러 장군이 모여 걱정만 하자 관창이 나서서 싸우기를 자청하였다.  그러나 장군들은 그가 나이가 너무 어려 들어주지 않았지만 자기의 굳은 결심을 여러번 주장하여 허락을 받고 적진에 뛰어 들었다가 사로잡혔다.  계백은 관창의 용맹과 나이 어림을 생각하여 살려보냈다.

그러나 '결코 이기지 못하고 살아 돌아와서는 안된다'는 아버지의 교훈을 생각하고 다시 적진으로 돌진하여 용감히 싸우다가 다시 잡혔다.
계백은 그의 용맹과 애국심에 감탄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목을 베어 그의 말 안장에 얹어 돌려보냈다.
이를 본 신라 군사들은 크게 감동하여 백제의 5천 결사대를 무찌르고 승리를 거두었다.  싸움에 이긴 신라는 전사한 관창에 급찬의 관위를 내리고 예의를 갖추어 장사를 지내주었다.

 

 

김유신(595년~673년) - 선덕여왕 14년 ~ 무열왕 17년

신라시대의 장군. 김수로왕의 12대손으로 15세때 화랑이 되었다.  639년(진평왕 51년) 아버지와 함께 고구려의 낭비성 공격에 참가했을 때 홀로 적진으로 돌진하여 적장의 목을 베어 옴으로써 신라군의 사기를 더 높여 승리를 거두게 하였다. 644년 상장군이 되어서 백제에 빼앗겼던 일곱성을 되찾았으며 돌아올 때 백제군이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가 크게 무찔렀다.

674년 왕족인 신하 비담과 염종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 반란군을 토벌하였으며 진덕여왕이 왕위에 있는 동안에는 백제의 공격을 잘 막아냈다.  660년(무열왕 7년) 상대등이 되고, 당나라의 소정방이 이끄는 군사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668년(문무왕 8년) 나 · 당  연합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서울인 금성에 남고 김인문과 김흠순 등의 장군을 보내어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세상을 떠난 뒤에 흥무 대왕의 칭호를 받았다

 

 

삼강(三綱)이란

유교 도덕의 뼈대가 되는 세가지의 도리입니다.  곧,  
임금과 신하 (군위신강-君爲臣綱),
아버지와 자식(부위자강-父爲子綱),
남편과 아내사이(부위부강-夫爲婦綱)에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합니다

 

 

오륜(五倫)이란

유교의 도덕에서 다섯 가지의 가르침을 일컫는 말입니다.
부자유친(父子有親) : 아버지와 자식 사이에는 친함이 있어야 하며,
군신유의(君臣有義) :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리가 있어야 하며,
부부유별(夫婦有別) :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분별이 있어야 하며,
장유유서(長幼有序) :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는 차례가 있어야 하며,
붕우유신(朋友有信) : 친구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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